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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때는 말야

by 세컨ㄹrㅇI프 2023. 11. 14.

요즘에는 나 때는 말야를 사용하면 뭔가 사회에서 도태된 사람처럼 보이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꼰대가 되어서 모든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는다고 하는데요. 

이 시대에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나이 든 분들이 무시를 당하는 경우가 생겼을까요? 

웃어 넘기기에는 다소 심각한 사회적인 문제고 발상입니다. 

하나하나 짚어보고 풀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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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 

1. 웃어른의 공경하는 것. 기본적인 예절

2. 시대의 변화와 원인

3. 왜 나 때는 듣기 싫어하는 것일까?

4. 서로가 공감하는 길

 


1. 웃어른의 공경하는 것. 기본적인 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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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예로부터 동방예의지국이라고 불려 왔습니다. 

조선이라는 이름 역시도 아침 '조' 자를 써서 아침의 나라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죠.
중국에서도 조선을 가리켜 동방에 예의가 있는 선비의 나라라고 하였습니다. 

동이족이라고도 표현하였죠.
(사실 여기서 '이'자는 오랑캐라는 의미인데, 중국인들이 더 오랑캐면서 동쪽의 오랑캐라고 하니까 더 웃기기는 함)

예의범절을 중시하였고, 예의가 가장 기본이 되는 덕목의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삼강오륜도 배웠고, 부모를 대하는 방법을 극진히 배웠던 나라였습니다. 

부모가 부르시면 입에 있는 음식을 뱉고서라도 대답해야 하는 게 과거에는 '국룰' 이였죠.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이미 나 때는 말이야 가 나옵니다.) 동네에서 웃어른을 보면 인사를 하고 윗집 아랫집 할 것 없이 동네의 어르신은 무조건 존경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냥 나이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대를 받는 시대였고 교육이었습니다. 

선생님의 그림자는 밟지도 않는다는 말이 있었는데 지금은 선생들을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밟고 있죠. 참 개탄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떨까요? 

지금의 상황에서는 과연 어떤 나라의 이미지가 되었을까요? 기본적인 예절을 갖추고 도덕적인 입장에서 바라보아야 할 웃 어르신들을 왜 이처럼 깔보는 시대가 되었을까요? 

 

 

2. 시대의 변화와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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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도 이야기 했습니다. 말세다.

 

요새 젊은것들을 보면 말세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현재에 들어서만 하는 말이 아닙니다. 과거 소크라테스가 남겼던 말 들 중에서도 젊은 이들을 보면 '말세'라고 표현을 하였으니까요. 

고대의 그리스국가나 현대의 국가나 별 다를 바가 없이 말세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 시대에는 그 시대 나름대로의 존중과 권위가 있었습니다. 현재와는 확연하게 다른 입장들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무엇 때문에 시대가 이렇게 변하였고, 웃어른에 대한 공경과 도덕심이 사라진 것일까요?
-저는 나 때는 말이야 하면서 이야기하는 어른들을 무시하는 세대가 곧 공경과 도덕심이 사라졌다고 느끼기에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시대의 변화에 따른 원인이 확실합니다. 

과거에는 이렇게 까지 무시하지 않았었죠. 어른에 대한 기본적인 공경도 가정에서 교육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모두가 사라진 시대가 되었습니다. 

 

(1) 가정교육의 부재

가정이 핵가족화가 된 것은 이미 오래전 일입니다.
이미 지금은 아예 아이를 낳고 있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아이를 낳는다고 해서 얼마나 교육을 하고 있을까요?
밥상머리 교육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밥상에서부터 아이를 교육하고 어른에 대한 공경을 배우게끔 하는 것입니다. 

어른이 먼저 수저를 들면 그 이후에 식사를 하는 것이 당연한 예의였는데요. 지금 현재의 아이들에게 이런 내용을 교육하는 부모가 몇이나 있을까요? 저에게는 아이는 없지만 5살 조카가 있습니다. 그 조카에게도 부모가 있지만 같이 밥을 먹을 때에 누가 먼저 수저를 들고 먹어야 하는지 가르치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물론 따지고 보면 왜 어른이 먼저 밥을 먹어야 하는지 수저를 먼저 들어야 하는지에 대한 기본적인 원인은 없습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그렇게 배워왔고, 그래 해왔으니까 문화적인 입장이라고 보입니다. 공경에 대한 의미이기도 합니다.

어디 가서 식사를 할 때에 수저를 바로 들지 않고 어른이 드실 때까지 기다렸다가 먹게 되면 뭐라고 합니까?
가정교육 잘되었다고 하거든요. 그만큼 기본 교육에 대한 인식으로 아직까지 자리 잡고 있는 겁니다. 

 

그럼 왜 교육을 안 하는 것일까?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게 맞다고 보입니다. 

먼저는 같이 식사할 시간과 겨를이 없습니다.
맞벌이 부부가 대다수이고 가족들이 다 모여도 늦은 저녁 시간들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유치원부터 하여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면 학원을 다니죠. 그런데 그 학원도 한 두 군데가 아니라 두세 군데를 다닙니다.
가정에 있을 시간이 별로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자연스레 가정교육보다는 사교육과 다른 학습적인 교육만 받습니다.

기본적인 인성을 교육받을 수 있는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렸을 적에 어떤 환경에서 자라나고 교육을 받았는가는 중요한 점입니다. 그러하기에 교육에 대한 내용은 속담으로도 있습니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만큼 조기교육이 중요한데 그것을 가르치지 않는 것입니다. 

밥상에서부터 어른을 공경하는 법을 배운다면 그 이후에 자연스레 아이들은 어른을 먼저 공경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핵가족화와 현대에 들어선 맞벌이의 내용이 곧 가정교육의 부재를 낳게 되었습니다. 

 

(2) 정보의 발달로 인한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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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화 사회가 정보의 발달이 참 잘 이루어졌습니다. 

손 안에는 이미 정보를 가득 들고 있는 스마트폰이 존재하고 있죠. 내가 모르는 것이 있으면 손 안의 스마트폰으로 확인하면 됩니다. 

누군가에게 물어봐야 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죠. 

과거에는 어떠했을까요? 무엇인가 배우고자 한다면 누군가에게 배워야 하는 게 필연적인 요소였습니다. 사람과 사람 간에 대화를 통한 교육과이해 그리고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정보를 많이 갖고 있는 누군가를 찾아가야 한다는 점이었죠. 

그러니 어떠합니까? 정보를 많이 갖기 위해서는 경험이 필요하고 경험을 많이 한 분들은 자연스레 나이가 있는 분들이죠. 즉 어른을 찾아가 봐야 한다는 겁니다. 

삶의 필요성을 배우기 위해서는 웃어른과의 유대관계가 있어야 하기에 당연히 그 관계를 잘 유지하려면 기본적으로 '예의'가 있어야 했습니다. 이게 가장 큰 이유이겠죠. 

정보의 발달로 인한 내용은 더 이상 웃어른이 필요치 않게 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갖고 있는 정보와 지식을 인터넷이라는 바다에 넣어두고 거기서 하나씩 찾아 올립니다. 누군가를 찾아갈 필요도 없고 내가 굳이 알기 위해서 '굽신' 거리지 않아도 됩니다. 아쉬울 게 없다는 것이죠. 더욱이 인터넷의 정보보다 어른이 알고 있는 정보가 잘못된 경우도 있기 때문에 때로는 그러한 정보에 신뢰를 잃게 됩니다. 

이를테면 화상에 된장을 바르라 라는 민간요법.
이 내용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게 지금 통하는 내용이라고 보이시나요? 

말도 안 되는 민간 처방법이죠. 도리어 잘못될 수도 있습니다. 흉터가 더 지고 자칫하면 평생 가는 피부 자국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과거에는 이런 내용을 소통했고 처방을 했습니다. 지금 화상 당해서 이렇게 하라고 하면 하실 분들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과거에는 그렇게 했습니다. 잘못된 내용이지만 웃어른들이 그리하라면 그렇게 해서 낫는 줄 알았습니다. 

지금은 이런 내용이 사라지고 신뢰를 잃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어른과 소통하는 계기가 사라졌고 더 이상 정보를 얻을 내용도 없습니다. 오히려 정보의 장은 인터넷을 통해서 더 많이 얻게 되고 삶의 질도 그만큼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3) 인성 교육의 부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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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도덕이라는 책을 교과 과정으로 배운 적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특히 유교 사상이 강한 나라라서 웃어른과 가정에서의 예의를 많이 강조해 왔습니다. 교과 과정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는 것이죠. 물론 지금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있고 존재하는 교육들입니다. 

그런데 도덕적으로 살아가면 세상에서 성공할까요? 그럼 몇이나 얼마나 성공할 수 있을까요? 무한 경쟁의 시대에서 이미 학생들은 국어 영어 수학을 위주로 공부합니다. 도덕적인 내용으로 수능을 치는 것이 아니니까요. 기준과 잣대 자체가 사회적으로 인성교육을 사라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니 오죽하면 이제는 인성자체가 대학 시험의 일부로 넣겠다고 하는 정책까지 나왔을까요? 

이러한 사회를 만든 것은 어른들의 잘못이기도 합니다. 왜 이런 사회가 되도록 내버려 두었을까요? 

왜 인성이 아닌 다른 교육에 집중하도록 하였을까요? 조금 더 깊이 있게 생각하자면 이는 대한민국의 입지적인 여건과도 상관이 있습니다. 삼면이 바다이고 나라의 자원은 한정적인데 모든 인구는 수도 서울을 중심으로 몰려있으니 여기서 변별력을 갖게 하기 위해서는 인성적인 부분보다는 객관화시킬 수 있는 점수제도가 필요했겠죠. 사실 수능이라는 제도가 일본이나 영국 제도를 따왔다는 말이 있는데 한국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런 공부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것도 한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차라리 외국어 공부를 더 시켜서 해외를 발판으로 움직이는 것이 더 효율적이기에 대다수의 부모들은 해외유학을 선택이 아닌 필수적인 요소로 꼽고 있습니다. 

내용이 다른 곳으로 샐 수 있기에 각설하고요. 

중요한 점은 인성교육의 부재로 인하여 웃어른의 공경은 더욱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어디서 알 수 있냐고요? 

우리 사회 각 분야에서 일어나는 사건 사고를 보세요. 어른에게 대하는 젊은이들의 태도, 부모를 대하는 학생들의 태도.. 이미 각 시대 전반에 걸쳐서 패역한 시대라는 것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러니 모두가 입을 모아서 이야기하는 것이 이 시대가 바뀌어야 한다고 하는데, 정작 중요한 것은 그러한 노력이 적다는 것이죠. 

되려 학부모들은 선생님 쫓아가서 괴롭히기나 하고, 그 선생이 죽음으로 생을 마감한 사건까지 있지 않았습니까? 

얼마나 안타까운 현실인가요.
그러니 이러한 인성 교육의 부재는 어느 한 부분만 놓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움직여야 하고 모두가 개선해야 할 내용이라고 보입니다. 

 

 

3. 왜 나 때는 듣기 싫어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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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나열된 내용들을 보면 이미 요즘 시대가 나 때는 말이야 를 듣기 싫어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연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아이를 보면 부모를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듯이 요즘의 시대 아이들을 보면 시대가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지가 잘 드러납니다. 

모두가 부모이고 모두가 교육자라는 것이죠. 

그냥 이 시대가 잘못되었고 아이들이 버릇이 없으며 가정교육을 못 받았다고 해서 지적만 할게 아닙니다.
어른인 우리의 입장에서 이미 책임이 있다는 겁니다. 내가 아이를 낳지 않았어도 이미 그런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잘못된 생각과 편견으로 바라보기에 그렇다는 겁니다. 

더불어 나 때는 말이야 하는 그 말속에는요...

나 때는 이러했는데 너는 왜 이렇게 하느냐라는 말이 이미 말속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네가 하는 일에 대해서 내가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누구나 공감을 원하고 내가 하는 말에 경청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창조주가 인간을 지을 때 말을 적게 하고 많이 들으라는 의미로 입하나에 귀를 두 개 지으셨다는 말이 있죠.
그만큼 말은 적게 하고 들어야 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입은 닫고 지갑을 열어야 할 이유가 여기 있는 겁니다.

내가 경험한 생각과 표현을 말하고 싶고 전달하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조건 듣기 싫어하는 세대를 탓하고만 있는 게 과연 어른의 입장이겠습니까?

 

4. 서로가 공감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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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의 인구는 늘어가고 젊은 사람들은 줄어들고 있는 인구 절벽의 시대라고 합니다. 

대한민국도 이미 실버세대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 말인즉슨, 또 많은 나 때는 말이야 하는 꼰대들이 많이 생긴다는 겁니다. 그럼 기존의 젊은 층을 개선시키고 교육만 해야 할까요? 

우리는 상생을 해야 하고 공감을 하면서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입니다. 공동체로써의 노력과 수고가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누군가 한쪽만 일괄되게 변화되는 것을 원할 것이 아니라, 함께 변해야 한다는 것이죠. 

내가 우대받고 싶고 존중받고 싶으면 먼저는 다른 이들부터 존중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쓰여있죠. 

대접을 받고 싶거든 너부터 대접을 하라.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라 등등 이미 가르침들이 있습니다. 

이런 내용은 종교적인 내용이 아니라 기본적인 도덕성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매장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생이 나이가 젊다고 무조건적으로 반말을 해야 하나요? 또는 나이가 많으니까 반말해도 괜찮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러면 그런 내용이 과연 어디 삼강오륜이나 예의에 대한 내용으로 나와있습니까? 삼강오륜과 유교적인 사상은 서로가 존중할 때에 이루어지는 것이고 예의와 범절 역시도 서로가 존중할 때에 사회의 구성으로써 질서가 유지되는 법입니다. 

나이가 많다고 해서 무조건 우대받으려고 하는 생각. 
나이가 많다고 해서 무조건 존중받으려는 생각. 

이미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러한 내용으로써는 서로가 공감과 상생을 이룰 수 없습니다. 시대를 떠나서 나이 든 분들은 존중받아 마땅합니다. 밥한수저라도 더 드신 분들은 연로하신 분들이고 나이가 우선순위로 생각되는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더욱더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 당연성을 갖기 위해서는 서로가 공감이라는 창구로 소통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현재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꼰대들의 입장이 아닌가 싶네요. 권위와 당연성, 그리고 존중받고 싶어 하는 높은 고자세를 겸허하고 겸손한 모습으로 바꾸어야 하는 것이 우리 이 시대 어른들의 입장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다면 자연히 젊은 세대들은 그것을 보고 배워갈 것이고 서로가 존중하는 사회 안에서 꼰대라는 말도 그리고 나 때는 말이야 라는 말도 사라지겠죠. 

저는 도리어 이런 말들이 돌아다니는 것을 보면서 소위 꼰대 입장에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나 역시도 존중받으려고 했던가, 나이를 통해서 우대받으려고 했던가. 그러면 얼마나 나는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살았던가 하고 말이죠. 

결론은 그러하지 못했기에 더 겸허하게 살아야 한다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나름대로 분석한 내용이라서 길게 써보았습니다. 개인의 사견과는 다를 수 있기에 다른 시각이 있으시다면 댓글로 부탁드려요.